[오마이뉴스 한림랩 뉴스룸] 김유정-방정환을 말할 때 빼놓으면 안 될 이름, '차상찬'
  • 등록일 : 202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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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방정환을 말할 때 빼놓으면 안 될 이름, '차상찬'

[한국언론자유운동 100주년] 일제 언론탄압 규탄 '전조선기자대회' 주도…첫 월간지 '개벽' 발행도


"나는 언제나 청년 되기를 좋아하는 까닭에 명색 호(號)를 청오(靑吾)라 지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우리 조선을 청구(靑邱)라 하는데, 나의 고향인 춘천은 또 조선의 동쪽이요, 나의 신앙하는 종교도 동학(東學)이요, 거기에 또 나는 청년 되기를 좋아합니다. 동방의 색이 청이란 것과 사람의 청년이라는 그 청(靑) 자를 취해 호를 지은 것입니다."


차상찬 '나의 아호-청오' 『중앙』 4권 4호 (1936년 4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5년. 일제의 식민 통치가 극에 달했던 그해 4월 15일~17일 경성 천도교기념관에서 일제의 언론 탄압을 규탄하는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렸다. 그날 전국에서 723명의 기자가 모여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른바 한국언론자유운동의 시작이었다.


5개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친목과 협동을 공고히 하여 언론의 권위를 신장·발휘하기를 기함 ▲신문 급 기타 출판물에 관한 현행 법규의 근본적 개신을 기함 ▲언론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체 법규의 철폐를 기함 ▲동양척식회사를 비롯 현행 조선인 생활의 근저를 침식하는 각 방면의 죄상을 적발하여 대중의 각성을 촉함 ▲대중운동의 적극적 발전을 촉진하기를 기함. 이 중 불의에 저항하는 저널리즘 정신을 고스란히 담았던 3항과 4항은 일제에 의해 신문 보도가 금지되는 상황까지 겪었다.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였던 33명의 위원 중 서기를 맡았던 언론인이 있다. 대회를 주관한 언론 결사체 무명회(無名會)의 일원이었던 그는 5개 항의 결의문을 직접 수정 및 작성하는 등 전조선기자대회를 주도하며 일제의 언론 탄압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바로 잡지사 '개벽사' 창간멤버로 활동하며 이름을 날린 청오 차상찬(1888년~1946년)이다. 한국언론자유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시점, 한림랩 뉴스룸은 한국형 저널리즘 운동의 시작을 주도했던 차상찬의 삶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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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오 차상찬의 사진들윗줄 왼쪽부터 보성중학 졸업사진(1910.4.), 잡지『제일선』에 실린 캐리커쳐(1932.8.), 잡지『야담』에 실린 필자 사진(1936.2.), 〈조선일보〉신춘인터뷰 기사 게재본(1939.2.), 아랫줄 왼쪽은 잡지『신동아』에 실린 각계 명사의 연말 진단 인터뷰 기사 게재본(1932.12.), 가운데 큰 사진은 촬영 연도 미상(50대 추정)의 가족 소장본, 오른쪽은〈조선중앙일보〉에서 장편소설 '장희빈'을 연재한다는 광고에 실린 필자 사진(1936.4.) ⓒ 사단법인 차상찬기념사업회


일제강점기 속에서 꽃핀 한국 최초의 종합잡지


한국언론사를 연구하는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의 '개벽사의 문화적 민족주의와 잡지 언론인 차상찬'에 따르면, 차상찬은 춘성군 신동면 송암리(현재 강원 춘천시 송암동)의 자라우마을 출생이다. 그는 한문학을 공부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 1906년 한성(현재 서울)으로 상경해 사립 보성중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했다. 이때 최초의 학생 잡지 '보중친목회보' 1호의 서기를 맡은 게 그의 첫 잡지 관련 활동으로 남아있다. 잡지 활동에 대한 관심 속에서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차상찬은 1910년에 보성중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그해 9월, 교단이 발행하는 잡지 '천도교회월보'에서 학술부로 활동하며 언론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본격화된 후 차상찬은 민중계몽과 국권회복에 힘쓰겠다는 다짐 아래 글쓰기를 멈추고 보성전문학교(현재 고려대학교)에 입학한다. 1913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차상찬은 이후 모교 간사로서 1918년까지 민법과 형법 과목을 맡으며 후진을 양성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펼쳐진 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 통치'로 탄압 방식을 바꾸며 조선인들의 신문 및 잡지 발행이 가능해졌다. 차상찬은 천도교 간부들과 후천개벽 사상에서 이름을 따온 개벽사(開闢社)를 세우고 잡지 발간을 준비한다. 마침내 1920년 6월 25일, 그들은 한국 최초의 종합월간잡지 <개벽(開闢)> 창간호를 발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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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창간호 표지차상찬이 참여한 『개벽』은 한국 최초의 종합월간잡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벽'의 언론인, 청오 차상찬


공공저작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개벽>은 정치·학술·종교·문예를 아우르는 종합지로서 일제의 정책에 항거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역점을 둔 일제강점기 시절 대표적인 잡지다. 창간호 때부터 우리 민족의 상징인 호랑이가 그려진 표지를 사용하며 일제의 눈엣가시로 자리 잡은 <개벽>은 1926년 8월 1일 발행한 72호를 끝으로 폐간될 때까지 논문 삭제 95회, 발매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 등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첫 번째 폐간 후 차상찬은 8년 뒤인 1934년, 자신이 직접 사비를 들인 후 발행인 겸 편집인을 본인 명의로 돌려 <개벽>을 속간하고 4호까지 이어갔으나, 일제의 탄압 속에서 1935년 3월 1일 다시 자진 폐간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광복 이듬해였던 1946년 1월, 개벽사의 초대 편집국장이었던 김기전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아 <개벽>을 복간했다. 호수는 의미를 이어간다는 맥락에서 1926년 폐간됐던 <개벽>의 호수를 이어 73호부터 시작했다. 차상찬은 복간호의 편집 고문을 맡았다. 1946년 3월 24일, 58세의 나이에 천주 곁으로 떠나기 직전까지도 <개벽>과 함께했던 것이다.


차상찬은 잡지 <개벽>의 산증인을 넘어 이를 발행한 '개벽사'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개벽> 뿐만 아니라 <혜성> <부인> <어린이> <학생> 등 개벽사가 발간한 11종의 잡지에 모두 참여했던 유일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편집국장, 발행인, 주간을 맡아가며 개벽사의 중추 역할을 수행했고, 이를 통해 총 120호가 넘는 잡지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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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사 단체사진『개벽』 강제 폐간 당시(1926년) 항의를 표현하고 있는 개벽사 직원들의 모습이다. 둘째 줄 가운데 흰 두건 쓴 사람이 차상찬이다. ⓒ 사단법인 차상찬기념사업회


인본주의와 현장중심주의를 통해 정론직필을 실현하다


차상찬은 개벽사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인연을 맺었다. 그는 춘천의 대표적인 문학가 김유정을 처음으로 등단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춘천 출신의 한 문학청년이 작가의 꿈을 꾸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1933년 개벽사에서 발간한 잡지 <제일선>에 김유정의 첫 작품 '산골 나그네'를 싣게 해준 것이다. 또한, 차상찬은 아동문학가로 잘 알려진 소파(小波) 방정환이 <개벽>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했다. 이 시는 '어린이'라는 순우리말이 조어된 계기가 됐다. 이를 계기로 차상찬은 방정환과 함께 5월 1일을 '어린이의 날'로 제정하는 것에 힘쓰기도 했다.


청오(靑吾)가 차상찬의 대표적인 필명이지만, 그는 이외에도 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첨구생(尖口生), 관상자(觀相者), 수춘산인(壽春山人) 등 70여 개의 필명으로 글을 기고했다. 차상찬에 대한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강원문화교육연구소에 따르면, 그가 쓴 글은 기사, 소설, 논문, 동화, 한시 등 분야를 막론하며 차상찬이 쓴 것으로 밝혀진 글만 현재 1천여 편을 넘는다.


그가 쓴 모든 글에는 진보적인 유학(儒學) 의식 아래 "모든 사람이 소중하다"는 인본주의 사상이 담겨 있다. 차상찬은 당대에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기 어려웠던 어린이, 노동자, 여성, 학생을 주제로 삼는 글을 다수 작성하며 언론의 사명인 사회적 약자 보호에 앞장섰다. 일례로 그는 <개벽> 50호에 '빈자의 여름과 부자의 여름'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불평등을 비판하고 비참한 현실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위로했다. 또한, 그는 일찍이 언론의 현장중심주의를 몸소 실천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일제의 각종 조사사업과 식민지 지배 정책에 대항하고자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13도를 답사한 후 지역의 피해 상황을 점검하는 르포 기사 '조선 문화 기본조사'를 기획했다. 차상찬은 평안북도와 함경북도를 제외한 11도의 답사를 직접 맡았으며, 특히 고향인 강원도는 약 100일의 시간을 들여 홀로 전역을 조사해 기사를 작성했다.


숱한 압력 속에서도 조선의 '개벽'을 위해 정론직필(正論直筆)을 실천했던 차상찬은 그야말로 일제강점기 잡지언론계의 전설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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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차상찬 학술대회지난 9월 30일, 춘천 한림대학교에서 열린 ‘2025 차상찬 학술대회’ 참여자들의 단체사진이다. ⓒ 사단법인 차상찬기념사업회


차상찬을 기억하려는 사람들


2000년대가 시작될 때까지 차상찬은 학계에서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다 2004년 차상찬이 '강원의 자랑스런 문화인물'로 선정되면서 그 이름이 점차 호명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8년 뒤 '청오 차상찬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2015년에는 강원도민일보 김중석 사장이 그곳의 2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선양 사업이 시작된다. 그해 5월 29일에는 강원도민일보와 차상찬기념사업회의 협업 아래 춘천 공지천 조각공원에 청오 차상찬선생 동상이 제막됐고, 10월에 '강원문화교육연구소'가 설립돼 차상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체계를 갖췄다. 이를 통해 현재까지 차상찬이 쓴 글을 정리한 <차상찬전집> 1권~8권이 발간됐으며, 2016년부터 올해까지도 매년 '청오 차상찬 학술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차상찬 연구 사업은 최근 들어 더욱 확대되고 있다. 2023년 12월에는 강원도와 춘천시의 지원 아래 강원문화교육연구소가 차상찬의 글을 현대 한글로 번역한 <차상찬현대문선집> 1권을 발간하면서 차상찬의 저술 작품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높아졌다. 2024년에는 차상찬학회가 신설돼 기존 차상찬기념사업회의 차상찬 전집 발간 사업을 더 객관적이고 폭넓게 진행하고 있다.


한편, 2024년 1월부터는 강원문화교육연구소의 정현숙 소장이 차상찬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을 겸임하며 현재까지도 청오 차상찬에 대한 기념사업과 학술연구를 모두 이끌고 있다. 정 이사장은"차상찬의 글에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 그리고 미래세대에 대한 사랑과 희망이 오롯이 담겨있다"며 "다양한 가치와 사고가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문화와 인간다움에 대한 차상찬의 자각과 열성이 새롭게 이어지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덧붙이는 글 | 최민수 대학생기자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대학생기자가 취재한 것으로, 스쿨 뉴스플랫폼 한림미디어랩 The H에도 게재됩니다. (www.hallymmedia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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